부활절은 가장 오래 되고, 장기간 행해지는 유일한 축제였다. 부활절이 지니는 의미는(시대적 · 지역적 차이가 있지만) 준비 기간과 부활절 미사가 끝난 뒤 행하는 축제로 강조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한 세례 기간은 부활절이었다. 축제 내용은 일요일마다 성찬레에서 행해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었다. 로마에서는 소트르 주교(166~175) 때까지 고유한 부활축일은 없었던 것 같다. 부활축일은 일요일에 거행된 성찬 신비의 역사적 토대에 대한 숙고를 전제했으며, 이는 재림 연기의 결과로서 당연했다.
부활절의 날짜 결정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많은 저술가가 관여하고, 교회회의가 열렸으며, 빅토르 주교(188~199)가 주도하는 로마 교회와 소아시가 교회가 거의 분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1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로 본받아 니산 달 14일, 곧 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그 밖의 교회는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했다. 그러나 '14일파와 '주님의 날파' 사이의 논쟁은 단지 사소한 날짜 차이라는 문제만 아니라 축제 내용의 이해에 관한 강조점을 드러낸다. 사르데스의 주교 멜리톤의『파스카 설교』2가 분명히 밝히듯이, '14일파' 제식은 참된 어린양인 그리스도로 구약성경의 파스카 축제를 회상했다. 이와 달리 '주님의 날파'는 무엇보다도 주간 첫날에 에수의 부활을 회상했다. 이 두 파는 자신들의 부활절 날짜를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날짜를 인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가 로마의 주교 빅토르의 견해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교회와의 분열은 피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 다스만Ernst Dassmann, 교회사 1Kirchengeschichte I, 분도출판사, 340.

- 2세기 중엽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아니케투스와 부활절 날짜를 협상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을 때,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이룬 교회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교회사』5,24,17 참조). 로마의 주교는 소아시아 주교에게 성찬례를 주관하게 했으며, 두 사람은 평화롭게 헤어졌다. 후대에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소아시아인들이 부활절 날짜에 관한 그의 이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그들을 파문하려 하면서 더 완고하게 대응했다.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행 중에 로마에서 더 이상 손님으로 환대받지 못했고, 미사에도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서신을 주고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러 교회회의에서 빅토르의 월권에 대한 저항이 매우 격렬하여 그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르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이는 로마가 다른 공동체에 명령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는 로마의 권리를 드러낸다. 이론적으로 모든 주교가 동등하기에, 그들은 신앙에 대해 믿을 만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권과 다른 주교가 이단에 빠져있음을 단언할 수 잇는 전권을 지녔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각 주교좌가 특히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 두드러진 권한을 행하사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오랫동안 교회의 중심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1, 277.
-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부활절 설교로 여겨지는 이 강해는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이집트 탈출에 관한 예형론적 해석을 담고 있다. 파스카 어린양은, 유대교의 파스카 어린양을 폐기하고 당신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신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로 상징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의 모든 세대여 이를 듣고 보아라,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살인이 율법의 도시, 히브리인의 도시, 예언자들의 도시, 의롭다고 여겨진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구나! 누가 살해되었는가? … 땅을 매단 분이 스스로 매달리셨고 하늘을 동여매신 분이 동여매이셨으며, 만물을 고정시키신 분이 나무에 고정되셨구나! 하느님께서 살해되셨고, 이스라엘의 왕께서 이스라엘의 보수파에 의해 죽으셨구나!(94-96). 여기서 역사에 유령처럼 나타나는 요지(하느님 살해자 유대인)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멜리톤은 자신의 해석으로 유대인 대량 학살을 꾸미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자기 공동체에서 예수 수난이 지니는 의미를 해설하고, 아마도 부활절을 니산 달 14일로 확정하려 한 것 같다. 이 당시 교회가 관심을 둔 그리스도론적 주제, 곧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도 상당한 중요성을 지녔다. -같은 책, 108.
Posted by kims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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