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of [Jürgen Moltmann: Theologie der Hoffmung] pp.61
- Posted at 2008/04/04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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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강해를 완전히 새롭게 개정하여 제2판(1921년)을 내놓았는데, 그 이유로서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동생 하인리히 바르트Heinrich Barth로부터 "플라톤과 칸트 사상의 진정한 특징에 관해 더 나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실"을 들었다. 역동적이고 우주론적인 전망을 싫어하지 않았던 1919년의『로마서Römerbrief』제1판의 종말론이 이제부터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것과, 초기의 변증법적 신학이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이라는 사상적 도구를 가지고 작업하게 된 것, 그리그 그 신학이 칸트의 초월적 종말론의 매혹에 이끌린 것은 바로 이러한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은 '근원'과 같은 뜻을 지니게 되었으며, 종말은 영원에 의한 시간의 초월적 제한이 되었다. 바르트는 로마서 13:12("밤이 깊고, 날이 가까왔다")를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영원한 순간은 비교할 수 없이 매순간과 대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순간의 초월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참된 종말에 관해 말하자면, 모든 시간이 바로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말은 가까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관한 그의 주석도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마직막인 종말에 대한 무관심을 다음과 같이 보여 준다. "역사의 마지막Endgeschichte은 당연히 원역사原歷史Urgeschichte와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시간의 한계는 당연히 만물과 모든 시간의 한계일 것이고, 바로 그래서 필연적으로 시간의 근원일 것이다."
:플라톤과 칸트의 사상적 영향, 종말론에 대한 무관심.
ii. 이러한 초월적 종말론은 역사철학적으로 두 개의 용어, 즉 "모든 시대가 하나님에게 직접 맞닿아 있다"라는 랑케Ranke의 용어와 "영원과 마주보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현재이다"라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용어를 결합하여 작업한 것이다. 1922년 바르트는 "모든 순간은 계시의 비밀을 품고 있으며, 모든 순간은 계시적 성격을 갖는 순간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불트만도 1958년에『역사와 종말론Geschichte und Eschatologie』의 결론 부분에서 문자적으로 거의 똑같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여러분이 바로 그 순간을 깨워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할 때, 이런 종말론적 문장들은 - 우리가 이것도 '종말론적' 문장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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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1925년 칼 바르트는 '빌헬름 헤르만의 교의학 원리Die dogmatische Prinzipien Wilhelm Hermanns'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헤르마의 유명한 '자기Selbst'의 개념을 수용하고 극복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상세하게 전개하였다. '자기 계시'라는 사상의 전역사前歷史는 19세기 헤겔 학파에 속했던 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특히 바르트와 불트만이 계시와 관련하여 '자기'를 강조하게 된 것은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의 스승이었던 헤르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자기 계시'라는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헤르만의 신학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우리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Gottes Offenbarung an uns, 1908』라는 헤르만의 글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활동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지 않는다면, 달리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이 문장에서처럼 하나님의 계시와 활동, 인식을 하나로 결합하는 행동주의Akualismus를 대변한다. 논쟁의 초점은 - 이 문장을 헤르만의 의미로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트와 불트만이 헤르만으로부터 시작하다가 갈라지는 지점을 밝히기 위해 -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있다. 이 문장은 하나님이 분명 자기 자신sich-selbst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는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우리 자신uns-selbst에게 계시하신다는 뜻인가? 자기 계시라는 말에서 '자기'는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인가, 아니면 인간과 관련된 것인가?
:바르트와 불트만에게 영향을 주었던 헤르만의 '자기 계시'사상, '자기'의 실제적 의미.
iv. 이 문장을 가지고 헤르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분명하다. 계시는 가르침을 주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격양시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참 자아에서, 즉 당사자가 경험하는 순간의 저항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객관화할 수 없는 주체성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지만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생명처럼 해명할 수도 없고 유추할 수도 없으며, 자기 자신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헤르만의 신학을 대변하는 용어로서 인간학적 의미를 지닌 '자기'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하지만 바르트는 자신의 논문에서 '자기'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로서는 계시 신학의 최종적인 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 아버지, 아들과 성령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다, '비록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어둠 속에 계신다'는 것을 헤르만은 알고 있다. 자기 경험을 계속 강조하는 헤르만도 유독 삼위일체론에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런 언급이 헤르만에게 적합한 것인지는 제쳐놓기로 하자. 바르트가 바로 이 점에 착안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헤르만의 '자기'를 뜻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대치하였다는 사실은 바르트 신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엄을 생각할 때, 자신의 삼위일체적 위격의 순수한 행동actus purissimus 안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설정하시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체성을" 우리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자獅子가 자신의 우리를 부수며, 전적으로 다른 '자아'가 진실함을 드러내며 등장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내어 주시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질문할 수 있게 된다." 교의학은 Deus dixit(하나님이 말씀하셨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금 순수한 '신앙의 사고'가 가능하기라도 한 듯이, 이른바 '체험'(마치 신앙에 관한 '체험'이 존재하기라도 한 듯이)의 꼭대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획득하려는 가망 없는 노력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서 신학적 지식의 근거는 종교적 체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자족성Autopistie, 독자성에 있다. 그리고 "입증된 것은 입증되지 못한 것처럼 내버려두는 편에 좋다."
:헤르만에게서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당사자의 주체성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바르트는 '자기' 주체성을 (인간)당사자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놓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내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숙고할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 근거는 종교적 체험이 아닌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자족성, 독자성에 있다.
v. 헤르만은 - 이것은 그가 칸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 계시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계시를 이론적 이성 앞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헤르만에 의하면 하나님을 객관화할 수 없다는 것과 각자의 실존 혹은 각자의 '자아'를 객관화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비밀이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은혜로 사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인식은 '종교적 체험의 저항할 수 없는 표현'이다. 헤겔의 설명처럼 그는 이해와 객관화의 '위험'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학문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점유한다는 것, 그 무엇을 이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학문이 파악할 수 없는 생명체들의 세상은 … 자각自覺을 통해,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각성을 통해 우리에게 열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객관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분이 우리 자신에게 행하시는 것만을 알 따름이다.
:헤르만은 계시를 객관적으로,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음과 하나님 인식을 종교적 체험의 표현으로 주장한다.
vi. 하지만 바르트에 의하면 종교적 체험의 저항할 수 없는 심원성深遠性 조차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자족성과 독자성을 주장하지 못한다. 그것은 '객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체가 되는, 참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근거를 지시할 따름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의식 활동에 맞서서, 그리고 그것 앞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하나님은 증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객과화할 수 없다는 부정적 발언조차도 여전히 바르트가 요구하는 사고의 전환에 도달할 수 없다. 바르트가 요구하는 전환이란 말씀Deus dixit의 행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초월적 주체성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것은 안셀름의 존재론적 신증명에서 이미 제시되었고, 그 다음에는 헤겔에 의해 상세하게 설명되었으며, 그리고 나중에는 바르트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사상으로 더 진척되었던 사상적 전환이다.1 이리하여 헤르만의 '자기'는 바르트에게서 신학적인 개념이 되엇다. 하지만 이것은 헤르만이 표영하였던 모든 특성들, 모든 관련성과 제한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종교적 체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체험 당사자의 경험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자족성과 독자성을 대변하지 못한다. 전환.
vii. 이리하여 헤르만의 '자기'는 바르트에게서 신학적인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헤르만이 표명하였던 모든 특성들, 모든 관련성과 제한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주로부터도, 인간 실존의 심연으로부터도 증명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시 자신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신다. 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오로지 그분의 계시로부터만 알 수 있다. 그분은 이런저런 것을 계시하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설명하시는 분이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안에서 추천되거나 변호될 수 없다. 하나니은 오직 신앙의 대상이 될 뿐인데, 그것도 그분이 자기 자신을 믿을 만한 존재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러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임재하시는데, 그 말씀은 증명될 수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입증한다. 헤르만에서서는 하나님 인식이 '종교적 경험의 저항할 수 없는 표현'으로 드러난다면, 바르트에게서도 말씀Deus dixit의 선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파괴할 수도 없 다. 하나님의 계시는 증명할 수 없고, 그래서 반박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증명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통해(말씀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오직 그분의 계시로만 알 수 있다(하나님의 주체성, 독자성).
viii. 그런데 하나님의 주체성에 관한 이 모든 생각들도 역시 하나님에 관한 고상한 사변일 수가 있다. 하지만 바르트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말할 때,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오직 로마 제국 시대에 쓰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작은 소식 묶음'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이 역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이 제기 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이해를 의미하는가? 삼위일체란 세 차례 반복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반영反映을 의미하는가? '자기 계시'란 역사와 미래가 없는 영원의 순수한 현재를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 사상에서도 '자기'라는 용어는 헤르만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이 더 이상 세계로부터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 후에 생겨난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하나님 증명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혀 있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를 나사렛 예수에 관한 소식 묶음에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에 관한 설명과 보고는 헬라적 신증명의 형이상학 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맥락 안에 있기 때문이다.
:헤르만의 용어 '자기 계시'는 헬라 사상의 영향에 아래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에 적합하지 않다.
ix. 여기서 인격성의 구조, 인격적 자아, 인격적 자기 반성과 자기 개명開明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이런 신학적 인격주의Personalismus의 길을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삼위일체론의 맥락 안에서 자기 계시의 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결합하였다. 삼위일체론은 자기 계시의 전개, 즉 '하나님의 말씀Deus dixit' 사건의 주체, 술어와 대상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생겨난다.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곧 계시하시는 자(아버지), 계시 사건(성령)과 계시된 자(아들)이다. 바르트

- 괴팅엔(Göttingen) 대학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강의하던 바르트는 개혁자들의 유산을 자신의 신학 체계로 흡수하였고, 그들의 신학을 이전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전의 체계를 조금씩 심화, 수정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신학을 사람들은 적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그 이전의 신학도 철저히 로마서 주석을 빌린 말씀의 신학이었지만, 특히 존재론적 신증명을 시도한 안셀름(Anselm)에 대한 바르트의 독창적인 해석서 'Fides quaerens intellektum'(인식을 추구하는 신앙: 1931년)이 출간된 직후부터 바르트는 자신의 사고에서 철학적, 인간학적 기초와 해명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신학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르트는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변증법(辨證法: Dialektik)적 체계는 유비론(類比論: Analogia)적 체계로 바뀌어 나갔고, 시간-영원의 종말론, 변증법적-수직적 종말론은 계시적 종말론, 성서적-수평적 종말론의 체계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철두철미하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인격, 사역을 통해서만 해명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그리스도론적 집중', '그리스도론적 일원론', '그리스도론적 보편주의' 혹은 '그리스도론적 왜소화'하는 말로 제각기 다르게 평가하였다.
Posted by kims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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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ürgen Moltmann, 대한기독교서회, 몰트만, 희망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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