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의 개척자 요한 칼빈-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칼빈평전, 정성구, 하늘기획(2009.5.8).
이 책『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은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의 설립자이자 현재 '칼빈박물관'의 관장인 정성구 목사가 쓴 것으로, 근래 칼빈에 관한 전기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에 속한다. 근래 출간된 칼빈 전기들 가운데 특별히 올해 칼빈탄생500주년을 기념하여 쓰여진 다음의 저술들이 눈에 띈다. 처음은 '한국칼빈학회'에서 출간한 『칼빈, 그 후 500년』이며, 다음은 '오정호' 목사의 『칼빈과 한국교회 -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이고,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하는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양의 논문과 단행본 등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위의 책들에 주목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들이 개신교내, 특별히 장로교단에서의 신학적 영향력이 상당한 것과 두 번째는 칼빈과 칼빈주의에 관하여 교리적인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교리적 칼빈의 재해석과 적용에 의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의 왜곡된 행태를 교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좀처럼 쉽게 넘겨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칼빈과 그의 삶, 그리고 칼빈주의라 표현되는 신학에서 발견해야 하는 하나님의 덕목들 - 이를테면 사랑과 자유, 그리고 경건 등 - 을 어떤 하나의 관점에서만 발견하려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오류의 결과들을 가져다 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사변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행해지는 모든 사태들이 이를 증명한다. 교회와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을 목도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침울할 때가 없을 정도이며 우리 모두는 이 사실에 공감한다. '교회를 교회되게'라고 한참을 부르짖지만 과연 그 본질적 의미(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에서 찾아야 할)를 올곧게 표현하고 있는지 좀처럼 궁금하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칼빈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서문에서 저자는 글 쓴 동기를 '개혁교회가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고수한다 말하지만 그 사상을 옳게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교권수호를 위한 방패막이로 생각할 뿐이며, 그러하기에 모든 교역자와 평신도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르기까지 칼빈을 바로 알게하기' 위함이다 라고 밝힌다. 그런 연유로 저자의 글쓰기는 매우 평이하다(모든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바르게 이해한다면 반드시 교회는 그 본질에 맞는 교회로 변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이 기대는 틀린 것이 전혀 아니다. 16세기 칼빈이 추구했던 경건의 그 본래적 의미에 다가서기 위한 궁극적 삶의 표현이 있다라면 우리의 기대는 헛된 희망에 불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조금 비뚤어져 있다면 오히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정반대의 방향에 서있을 것이다. 그럼 저자의 출발점은 과연 어떠한가?
저자가 밝히듯 52개의 주제로 진술되는 칼빈의 이야기는 1년 52주를 염두해서 쓰여졌는데, 각각의 주제에서 다양한 칼빈의 역할을 비교적 평이한 서술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변혁의 시대 안에서 한 개인으로써의 칼빈이 ‘시대의 영웅’으로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먼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 특별히 칼빈이 사역했던 스위스 제네바로 독자를 인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신학자, 경건한 믿음의 사람, 성경주석가, 설교자 및 목회자 등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것 이외에도 저자가 말하는 칼빈은 정치․경제․사회․문화․윤리․음악 등 인류 문화 전방위에 걸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개혁교회가 대부분 그러하듯 저자 역시 칼빈을 루터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특별히 그는 칼빈이 지난 천년의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는데, 그 이유는 신학을 우선하여 현대 사상과 세계의 구조 즉 자유민주주의 체계와 경제 시스템이 칼빈에게서 기인하며 서구 역사의 정신적 기조 역시 이와 동일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아가 16세기 유럽이 영웅 칼빈을 만들었고, 영웅 칼빈이 16세기와 그 후 시대를 만들었다고 칭송한다. 저자는 아무래도 칼빈에게서 역사로 나아가는 방식을 먼저 채택한 듯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적인 칼빈과 칼빈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모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된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말하자면 평범하고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모호한 경계가 가장 위험하다.
난 이 글이 비록 학술적인 서술보다 일반인 독자들을 위한 평이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저자 스스로 말하길 평이한 서술이지만 수십년 동안 자신이 독서하고 연구한 칼빈의 정수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이 작은 책은 교회를 다시금 새롭게 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나쁘지 않다: 일반인 독자층이 칼빈과 그의 신학에 관하여 포괄적 이해를 도모하는데 있어서는. 하지만 옳지 않다: 문명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평신도들을 외눈박이로 만들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이른바 ‘경건서적’이라 분류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탐독하는 사람들 대부분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들은(평신도) 자칭 혹은 타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신앙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신앙적 우월감은 교회 안팍을 넘어선다. 이들은 자신이 비록 어떤 특정한 분야의 지적 능력이 모자란다 치더라도 자신의 판단 - 특별히 성경을 기준한 - 은 그 누구들보다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리 쉽게 경건서적 읽기를 즐겨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매도’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뒤따르지만, 분명 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것에는 무비판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열광하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발견되는 태도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고 이끌어갈 이들이 성과 속의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다시 영웅 칼빈이다. 500년 전 영웅을 다시 이 땅에 불러들임으로써 난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영웅을 감히 흠잡고 비방할 수 없다. 사실이지 이 글을 쓰는 나조차 그저 한 인간으로써의 칼빈에게서 그 어떤 흠을 잡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전수되어 온 그리스도인 특유의 편향된 견해에 동일하게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흠? 이것은 인간으로써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완전함에의 본래적 모자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정하고 감추려 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하지만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채울 수 있다. 약하고 모자란 존재로써의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영광을 위하여 고뇌하고 좌절하며 다시금 일어서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 본연의 임무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주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 직선적으로 진행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인류의 역사는 일정 반복하고 순환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필경 발견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반드시 인간을 아는 지혜 또한 포함한다. 타락한 인간과, 인간의 욕망에 의한 반목과 대립의 치졸한 '인간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면, 이 모든 것을 새롭게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는 이해로 치장한 오해만을 하게 될 뿐이다.(*)
Posted by kims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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